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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__평범한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국전자출판교육원장 뚱보강사 이기성,경기칼럼 2022-5-21
관리자  2022-05-21 14:25:15, 조회 : 55, 추천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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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__평범한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국전자출판교육원장 뚱보강사 이기성,경기칼럼 202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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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__평범한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국전자출판교육원장 뚱보강사 이기성,경기칼럼 202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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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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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__평범한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국전자출판교육원장 뚱보강사 이기성,경기칼럼 202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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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__ 평범한 최후의 승자 이에야스
뚱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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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__평범한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10ok

뚱보강사 이기성





     514__ 평범한 최후의 승자 이에야스







"울지 않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인고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된 인물)로 인정되는데, 간토의 너구리(関東の狸)라는 별명이 있다. 너구리란 별명은 그의 외모가 퉁퉁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성격 자체가 무척 능구렁이 같은 성격이라 붙여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00년 이상 지속된 일본의 전국시대를 수습하고, 마지막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세력을 물리치고,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어서 250년간 지속되는 ‘에도 막부’를 열었다. 에도(江戶, えど)는 일본 도쿄의 옛 이름이다.



도쿠가와(徳川) 이에야스(家康)는 1542년 12월 26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 1526~1549)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다케치요(竹千代)다. 어머니는 미카와 국의 가리야 성의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로 이름은 오다이다. 지방 호족이었던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에야스의 조부 기요야스 시기에 부흥기를 이루었다.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1557년 이에야스는 이마가와(今川) 가문의 중신이자 그 일족인 세키구치 지카나가의 딸(후에 쓰키야마도노)과 결혼했다. 이때 조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清康)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마쓰다이라(松平) 모토야스(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이름을 바꿨다.



성장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今川) 가문을 위해 오카자키군(軍)을 거느리고 각종 전투에 참가했다.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군대를 이끌고 교토를 향해 서진할 때, 선봉에 서서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특히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오다카 성에 군량을 반입하는 작전을 성공시켜, 무장으로서 명성을 올렸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기습으로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전사하자, 자신의 고향 오카자키 성으로 귀환하여 자립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562년 이에야스는 오다 측에 선 외숙부 미즈노 노부모토의 주선으로는 이마가와 가문과 최종 결별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체결했다. 마쓰다이라(松平) 모토야스(元康)(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63년에 요시모토(義元)가 수여한 元康(모토야스)에서 ‘모토(元)’ 글자를 버리고, 元康을 ‘家康’으로(‘이에야스’로) 개명했다. 이것으로 명실상부하게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이에야스(家康)는 1566년 미카와 동부와 북부를 평정하여 ‘미카와 국’을 통일했다. ‘미카와 국’ 통일을 이룬 이에야스에게 일본 조정과 천황은 종5위하 미카와노카미(三河守)에 서임했다. 이에야스는 조정의 허가를 받아 원래 성(姓)인 도쿠가와(徳川)로 바꾸었다.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으로 도쿠가와를 사용한 것은 이에야스의 조부 기요야스 시기부터였다. 조정에서는 도쿠가와(徳川) 성의 사용에 대해 이에야스(家康) 직계에만 한정하고,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에 속한 다른 일족들에 대해서는 복성을 허가하지 않았다.





    도쿠가와(徳川) 막부



“#233__ 번역물 ‘대망’은 무죄” 제목의 칼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다(2021년 1월 25일). 17년간 홋카이도 신문, 도쿄 신문, 주니치 신문, 서일본 신문(1950~1967)에 연재된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소설 ‘대망’은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생모인 ‘오다이’부터 ‘이에야스’의 사망 시점’에 이르는 70여 년을 그리고 있는데, 한국의 태백산맥 소설의 두 배가량 분량으로 방대하다. 일본에서도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다. 메이지 이후의 일반적인 이에야스의 이미지에서,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이에야스’, ‘어떻게든 오사카 전투를 피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들 히데요리의 목숨을 살려주려는 이에야스’. 그러나 1615년 5월 8일에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사카성의 천수각이 불타고, 도쿠가와 가문의 군대가 물밀듯 몰려와서, 도요토미의 군대는 전멸했다.



한때, 일본을 지배했던 도요토미 가문은 ‘오사카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으로 대가 끊겼다. 대신 도쿠가와 가문의 위세가 굳어졌다. 막부(바쿠후,幕府)를 열어, 국왕 대신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의 시대는 개항(1854, 미국의 일본 개항)과 유신(1868,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던 시절, 일본은 농업 생산력 향상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풍요로웠다. 그러나 사회 변화에 따라 막부에 대한 거부감이 생긴다. 드디어,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일가를 격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세워져서, 제15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는 1867년 대정봉환 때까지 15대 264년에 걸친 도쿠가와 막부 통치가 끝난다. 메이지(明治, 1852~1912) 천황이 즉위하면서, 일본은 천황 직접 통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성은?



이에야스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말 수가 아주 적다’는 표현이 많다. 이러한 표현은 이에야스의 천성과도 관련이 있지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라는 난세 상황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 이에야스는 유달리, 선조 이래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가신에게 배신당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야스는 가신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소 신중한 태도를 취했고, 자연히 말수도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성품은 이에야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으며, 하극상이 만연한 센고쿠(戦国)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기도 했다.



[페친] 프로젝트 썸원(Content Owner Somewon Yoon)님이 <가장 평범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최후의 승자가 된 이유>를 올려주셨다. ① 전국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뛰어났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나중에 생겨난 것으로 결과론에서 나왔다. ② 비록 역사의 승리자임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평범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사례가 꽤 있다. 평범하다는 말이 어리석다는 의미는 아니다. ③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손잡았던 시절에는 성실하고 견실한 무장이라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수하 장졸도 강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 가문의 중신들에 비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담당하는 작전 범위와 동원 병력은 작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중신들보다 낮게 취급받았다.



④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노릴 수 있는 다이묘가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나칠 정도로 그를 우대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오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260만 석의 영지를 하사해서, 단번에 2배에 가까운 거대 다이묘로 만들어줬다. 다이묘(大名)는 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렸던 영주를 말한다. 다이묘는 쇼군 바로 아래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쇼군(將軍)은 무신정권 막부의 수장이다. 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성실한 동맹자로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한 것인데, 결국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라고도 할 수 있다.



⑥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따르던 명장들이 잇달아 죽은 것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존재감을 키웠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유력한 경쟁자가 없는 가운데 260만 석을 자랑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독보적인 실력자가 되었다. 천재도, 카리스마적인 존재도 아닌 보통사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꾸준히 노력하고 학습하고, ‘마카타가하라 패전’과 같은 실패에서 배우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를 거름 삼아서 성장했다. ⑦ 이런 과정 끝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위업을 달성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칭송할 만한 일이다.





    이에야스 ‘우거지상’ 초상화



⑧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나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화가 남아 있다.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라고 불리는 강대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에게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패전한 ‘마카타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초췌하고 망연자실한 자신의 모습을 화가에게 그리라고 했다. ‘우거지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초상화는 지금도 전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틈나는 대로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교만함을 경계하지 않았을까?



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을 절대시 하는 일이 없었다.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독선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경우도 없었다. 항상 부하의 의견을 경청하고 회의를 중시했다. 게다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여준 불필요한 잔혹성도 지니지 않았다. 정치가로서의 평범한 그의 기질은 (오히려) 큰 이점을 동반했다. 이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격은 천하를 얻은 뒤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천재도, 카리스마적인 존재도 아닌 그는 자신의 한계를 숙지했기에, 권력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마침내 항구적인 패권을 안았다. [참고] 다부치 나오야, <<확률적 사고의 힘>>.





    이에야스, 다케다 신겐에 패배



1568년 ‘다케다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이마가와 가문을 공격하여 도토미 국은 이에야스가 차지하고, 스루가 국은 신겐 자신이 서로 분할하여 차지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제안에 호응하여 도토미로 출병했고, 같은 해 12월 신겐도 스루가를 공략했다. 이듬해 5월,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의 본거지를 함락하여, 도토미를 거의 평정했다.



이에야스는 1570년에 도토미의 히쿠마에 성을 쌓아 하마마쓰라고 이름을 짓고, 미카와 오카자키에서 이곳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노부나가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서쪽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서진 정책을 폈듯이,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 기대어 동쪽으로 영토를 늘려나가는 동진 정책을 폈다. 아울러 이에야스는 자신의 근거지 미카와 오카자키 성에는 장차 후계자가 될 노부야스를 두었다. 이 점은 노부나가가 새로운 근거지로 아즈치 성을 쌓고 기존 근거지인 미노 기후 성에 자신의 후계자인 노부타다를 둔 것과 유사하다. 노부나가가 교토 상경에 성공한 이후, 이에야스는 때때로 노부나가의 요구대로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아자이 · 아사쿠라 가문과 싸우기도 했다.



1571년부터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을 같이 공격했던 다케다 가문과 싸우기 시작했다. 당초 다케다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에 우호적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노부나가를 반대하는 세력의 규합을 촉구하자, 신겐은 이에 호응했다. 신겐은 자신의 동남쪽에 위치한 호조 가문과 동맹을 맺고, 창끝을 서쪽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아키의 촉구는 신겐에게 교토로 진격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그런데 신겐이 교토로 가려면, 우선 노부나가의 동맹군이자 자신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이에야스를 제거해야 했다. 이에 신겐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도토미와 미카와를 일시에 침공하여, 이에야스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여러 차례 도움을 요청했지만 노부나가도 아자이 · 아사쿠라 · 혼간지 세력의 대포위망 속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야스를 전면적으로 후원할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도토미 지역이 신겐의 손에 들어간 직후에야, 겨우 사쿠마 노부모리를 대장으로 3천 명의 원군을 보냈다.



다케다 군대는 이에야스의 근거지인 하마마쓰 성에 접근했으나 별다른 공격 없이 그냥 지나쳐 가자, 1572년 12월 이에야스는 성을 나와 뒤를 쫓았다. 당시 사쿠마 노부모리는 병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이유로 야전에서의 결전을 반대하고 농성을 주장했으나 이에야스가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양자는 미카타가하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싸움은 이에야스의 대패로 끝났다. 다만 패배했다고는 하나, 약 3배의 적군에 맞서 적극적으로 분투하였기에 큰 불명예는 아니었고 오히려 쓴 약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때의 패배를 상기하기 위해 고뇌에 찬 표정을 생생하게 그린 초상화를 만들어 늘 옆에 두고 곱씹어 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 이에야스는 단 한 번도 전장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고뇌에 찬 표정의 초상화가 바로 그 유명한 이에야스 ‘우거지상’ 초상화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면서 교토를 향해 가던 신겐은 그러나 1573년 4월 지병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최대 위기가 사라졌다. 다케다 군대는 일단 본국으로 후퇴했으나, 병력은 그대로 온존한 상태였기 때문에 신겐의 후계자가 된 다케다 가쓰요리는 군을 이끌고 곳곳에서 싸움을 벌였다. 가쓰요리는 도토미를 침공하여 1574년에는 일찍이 신겐도 함락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다카텐진 성을 손에 넣기도 했다.



그러나 1575년을 계기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해 5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오다군과 연합하여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비록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다케다 가문은 이후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1578년 우에스기 겐신이 죽은 후에 후계자 상속과 관련하여 우에스기 가문 내에 내분이 발생했다. 이때 가쓰요리는 호조 가문과 적대관계인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지지했기 때문에, 다케다와 호조 가문 간 군사동맹이 깨졌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1579년 호조 가문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었다.



1581년 이에야스는 군사적 요충지 다카텐진 성을 탈환하여 가쓰요리를 더욱 압박했다. 1582년 3월 노부나가의 다케다 총공격이 실시되어 이에야스도 다케다 공략의 일익을 맡아 스루가를 거쳐 고후로 진격했다. 궁지에 몰린 가쓰요리가 자결하여 다케다 가문은 멸망했다. 이후 이에야스는 스루가를 지배하게 되었다. [참고] 일본 쇼군, 박수철.





    히데요시와의 싸움과 화해 2인자의 길



1582년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혼노지에서 죽었을 때, 노부나가의 초대를 받아 상경했던 이에야스는 오사카 인근 사카이에 있었다. 그는 노부나가가 죽은 것을 알게 되자, 이가 국의 험한 산길을 넘어 이세로 갔고, 이세에서는 배를 타고 미카와로 돌아갔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가이 · 시나노 지역으로 출진하여 호조 가문과 대치했으나, 10월에 화평을 맺고 가이와 시나노 동부와 남부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호조 가문은 고즈케 국을 얻었다. 이에야스는 둘째 딸 도쿠히메를 호조 우지나오에게 시집보내 인척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 중앙 지역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한 후에, 1583년 오다 가문의 유력자 시바타 가쓰이에마저 죽여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점차 독선적인 행위를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쓰는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끌어들여 히데요시와 대립했다. 1584년 이에야스는 오와리 국으로 출진하여 노부카쓰와 합류했다. 히데요시도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오와리 이누야마 성을 근거지로 삼아 고마키에 포진한 이에야스와 대치했다. 양자가 마주하고 있을 때 히데요시군 일부가 이에야스의 본거지를 급습하러 가다가, 나가쿠테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히데요시군의 움직임을 간파한 이에야스가 주력을 돌려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 별동대와 맞선 것이다.



히데요시의 별동대가 패배하면서 본거지 급습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로 빠져들었으며 대신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와 접촉하여 강화를 이끌어냈다. 애초에 전쟁 당사자들이었던 두 세력이 화해를 하자, 명분이 사라진 이에야스도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었다. 강화 조건으로 이에야스의 차남 오기마루(후에 유키 히데야스)가 히데요시의 양자(사실상 인질)로 들어가게 되었다.



1586년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노부카쓰를 통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설득했지만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4월 히데요시는 이복동생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 이에야스와 결혼시켰다. 그럼에도 이에야스가 복속을 표시하러 상경하지 않자, 10월 히데요시는 자신의 어머니를 아사히히메 방문을 구실로 내세워, 사실상 인질로서 오카자키로 보냈다. 이에야스를 얻기 위한 히데요시 식의 ‘삼고초려’였다. 이에 몸값을 한껏 높인 이에야스는 드디어 상경하여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신하의 예를 표하고, 히데요시의 추천으로 정3위 권중납언(権中納言)에 올랐다. 1603년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고요제이 천황에게서 쇼군으로 임명받고, 1605년 쇼군직을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다.



[참고] 233__ 번역물 ‘대망’은 무죄, 2021.01.25. 조회 484회.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49482

[참고] 프로젝트 썸원, Content Owner Somewon Yoon

https://www.facebook.com/somewon.yoon

[참고] 다부치 나오야, <<확률적 사고의 힘>>, 황선종 옮김,

에프엔미디어, 2022.

[참고] 일본 쇼군, 박수철, 德川家康 - 센고쿠 시대 최후의 승리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2608&cid=62070&categoryId=6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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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일본의 다이묘 분포도(157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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