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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 kg60칼럼 이기성
관리자  2020-08-10 21:18:24, 조회 : 78, 추천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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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__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
뚱보강사2020-08-09 19:34:50조회 31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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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이승만과윌슨주의와레닌주의---10

뚱보강사 이기성

http://kg60.kr/cmnt/2342/boardInfo.do?bidx=66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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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__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




심장마비에 걸린 중년 여성이 꿈에 하느님을 만났다. “하느님, 제가 죽을 때가 됐나요?”. “아니, 아직 40년이나 남았다". 다행히 복잡한 '관상동맥 우회술' 대신 가는 줄(카테타)을 통해서 풍선으로 혈관을 부풀리고, 스텐트로 혈관의 모양을 유지하는 간단한 '심장 스텐트 시술'을 마치고 퇴원했다. 그런데 중년 여성은 앞으로 40년 남은 인생을 최대한 멋있게 살 생각으로 다시 입원해서 안면성형수술, 지방흡입술, 복부지방제거수술까지 받았다. 그런데 수술을 다 마치고 퇴원하는 날.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어 죽고 말았다. 하느님 앞에서 간 그녀가 따져 물었다. "제게 아직 40년이나 남았다고 하셨잖아요? 왜 저를 차가 오는데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하느님이 응답하시길 “..... ..... 내 너를 몬 알아 봤다~". (참고: 페북, Choi Seung Woo님 글).



오늘은 비가 오는데, 날은 더운데, 차를 몰고 반포세무서 지하주차장에 대고, 열재고 방문기록 쓰고 납세증명서를 떼고, 동회(주민센터)로 걸어가서 열재고 방문기록 쓰고 지방세 완납증명서 떼고, 택시를 타고 강남역 2번출구 보증보험회사로 가서 열재고 방문기록 쓰고, 서류 만들고, 은행에 가서 열재고 방문기록 쓰고 정기예금 입금하고, 공증사무실 가서 열재고 방문기록 쓰고 공증을 받고, 다시 보증보험회사로 와서 열재고 방문기록 쓰고, 보증보험료 내고, 보험증권을 받고 시계를 보니 2시. 아침 9시부터 2시까지 5시간 동안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배가고파서 지하 식당에 가서 열재고 방문기록 쓰고, 알탕/회덮밥을 먹고서.



택시타고 차를 맡겨둔 대방역 사거리 반포세무서 지하주차장으로 돌아와서 열재고 방문기록표 쓰고, 차를 빼내어 방배동 집에다 차를 주차시키고. 코로나 땜인지, 웬일인지 세무서 지하주차 요금은 공짜네. 방배동 다방에서 건축회사 사장에게 5시간을 걸려 만든 서류를 넘겨주어 시청에다 제출하게 하고... 마스크를 벗고,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가쁜 숨을 가다듬는다.



1970년대 도서출판 장왕사 계열회사인 공양물산에서 아프리카 케냐로 출장을 나갔을 때 케냐의 거대 정치 세력인 기꾸유족과 루오족을 만나서 조모케냐타 대통령 이야기를 했다. 조모 케냐타가 영국과 독립운동으로 싸울 때 영국 경찰에게 잡혀서 전기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얼굴 근육이 흔들려 말을 하면 말이 떨려서 나온단다. 뚱보강사도 국민학생 때부터 우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일본인에게 전기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국민 여러분’하면 ‘국민 여어 러어 부운’으로 떨려서 들린다는 걸 알았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케냐(1963년 독립, 케냐공화국, The Republic of Kenya)뿐만 아니라 1970년 독립한 피지(피지민주공화국, The Sovereign Democratic of Fiji)도 ‘국민을 모래알처럼 흐트러뜨리라는’ 영국 식민 교육을 받은 국민들에게 알리는 통치 이념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였다. 수도 수바 시내 곳곳의 플랑카트에 ‘뭉쳐야 산다’라고 써 있었다. 영국의 식민 통치 방법을 배운 일본의 통치 방법도 ‘너희 국민들은 뭉치질 못한다. 서로 갈라져서 싸우는 민족’이라고 머리에 주입시키는 교육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승리한 치적으로 처칠이 진짜 신사이고 유머가 있는 훌륭한 위인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처칠의 진실은 정말 잔인하고 수많은 국가를 침략하고 자원을 훔쳐온 일본의 이등박문 같은 식민지 총독에 불과한 사람이다. 침략한 국가의 국민들이 뭉쳐서 독립운동을 일으킬까봐 아예 ‘너의 국민은, 너의 민족은 2등 국민이고,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안 되고, 뭉치질 못하는 인간들이라’고 식민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본관: 전주) 초대 대통령은 인간적인 약점은 많았지만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놓은 공로가 있다. 북쪽에서 김일성이 레닌주의를 따를 때, 이승만은 본인이 박사학위를 받은 프린스턴대 총장이던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윌슨주의를 선택한다. 20세기 초반은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공산주의가 정치 이념으로 경쟁을 할 시기였다. 21세기에 들어와 소련의 붕괴와 공산 중공이 자본주의 경제로 수정하여 부유한 중국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윌슨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윌슨의 자유민주주의와 정치적 자결주의, 레닌이 주창한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라는 두 사상의 대결은 윌슨주의의 승리로 결론났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 계몽운동,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1899~1904), 수감 시절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일제시대에 조선으로 귀국하여 교육계몽운동 등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하와이로 가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이승만의 박사 논문은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고,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창호와 갈등을 빚었지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이승만은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11월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시대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고,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고, 추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때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승만이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장면(張勉)을 주미한국대사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 부산 정치파동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 경제조항을 시장 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 두 차례 헌법 개정을 거치며 대통령직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에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일어난 4·19 혁명에 의해 책임을 지고 자진해서 하야했고, 곧 미국 하와이를 요양차 방문한 후 사망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집단농장화 과정에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나라를 파탄 낸 모택동에 대해 등소평은 "공이 7이라면 잘못은 3이다." 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간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친일파 청산을 못하게 한 잘못이 큰 이승만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공로는 의무교육 실시, 자유민주주의 노선 채택, 한·미방위조약 체결,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 선포 등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놓은 점이다. 농지개혁에 대하여 대부분은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였기에 성공적이었고,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유상분배였기에 불완전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북쪽의 토지개혁이 성공적이었다면, 왜 북한의 농업 경영이 성공적이지 못하고 농민들의 처지가 엉망인가? 사실, 북한은 토지의 무상분배를 한 적이 없다.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줬을 뿐이고, 그마저도 나중에 ‘집단농장화’를 했다. 소유권 없는 자유는 가치가 없다. 남한에서는 지주가 사라지고 자영농이 자라났다. 여러 경로를 통해 근대적 산업자본이 형성됐다. 필리핀은 농지개혁과 근대화·산업화에 실패해서 아직도 15대 지주 가문이 국가 부(富)의 50%를 차지한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높았던 필리핀의 국민소득은 지금 한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남한의 유상몰수-유상분배 토지개혁이 성공한 것은 필리핀의 예를 보면 확실하다.



​ 이승만 자신이 세운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그 자신이 위배되는 통치를 했을 때 교육받은 국민은 잘못된 통치 행위를 용인할 수 없었다. 경제 발전으로 먹고살게 되고 시민으로 성장한 국민이 박정희의 권위주의를 더는 못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지금 보면 이승만은 선각자였고, 윌슨의 이상을 따라 대한민국의 방향타를 옳은 방향으로 잡고 공산주의와 대결한 지도자였다. 현재의 세계 정치, 경제 흐름은 윌슨·이승만 노선이 레닌·스탈린·모택동·김일성 노선보다 옳았음을 증명했다.





* 북쪽에서 선택한 레닌주의(Leninism)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 마르크스주의를 시대에 맞게 해석해 러시아혁명과 세계혁명에 적용한 사상이다. 레닌은 수많은 공산주의자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정통 계승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마르크스의 사상 체계에 제국주의론, 전위당론, 노농동맹과 소비에트 등 세 가지를 새롭게 덧붙였다. 1895년 페테르부르크의 마르크스주의자 그룹을 '노동자 계급 해방투쟁 동맹'으로 통일 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됨. 1900년 국외로 망명 후 마르크스주의 신문 「이스카라」 발행. 1903년

볼셰비키 당을 건설함.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을 주도함. 1917년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함.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 성공함.



마르크스, 엥겔스의 후계자, 러시아 및 국제노동운동의 지도자, 러시아 공산당 및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창설자인 레닌의 실천 항목 5가지의 예를 들어본다.

1. 중산층을 세금과 인플레이션의 맷돌로 으깨버려라.

2. 더 이상 노력으로 계층 상승이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라.

3. 중산층을 과도한 세금과 집값 상승으로 척살하라.

4. 다수의 빈민층들이 가진 자를 혐오하게 만들어라.

5. 국가 공권력 및 구호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어 공산정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게끔 조종하는 것이 공산당 정권 유지의 비결이다.



* 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의 토마스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의 정치가이자 제28대 대통령(재임: 1913∼1921)으로 민주당 소속. 1918년 ‘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를 주창하였다. 노벨평화상 수상(1919). 버지니아주(州) 스톤튼(Staunton)에서 출생. 1879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버지니아대학 법대(Law School)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했으며, 1882년 변호사자격을 취득하였다. 1883년 존스홉킨스대학 대학원에서 법학 ·정치학을 공부하고, 188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5년 브린대학, 1888년 웨슬리언대학, 1890년 프린스턴대학(Princeton University)의 교수가 되고, 1902년 이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어 1910년까지 재임했다.



1910년 뉴저지 주지사로 당선되어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1913년까지 재임했다. 191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46차 표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하였고, 대통령선거전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임 대통령의 제3당 출마로 공화당이 양분되어 수월하게 현직 대통령인 하워드 태프트를 누르고 제2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윌슨의 정책은 대자본에 반대하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다수의 산업이익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세를 인하시킨 ‘언더우드관세법안(Underwood Tariff)’에 서명했으며 관세에 의한 수익이 감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 누진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개인금융기관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도입하였다. 1914년 ‘클레이턴 독점금지법(Clayton Antitrust Act)’이 통과되어 노사분규 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연방통상위원회 (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었는데 이 기구는 무역에서의 경쟁적 조건을 유도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간섭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주의를 표방하였으며, 1916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개시와 함께 미국의 무역과 생산은 활발해지고,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도 밀접하게 되었다. 미국에 대한 독일의 수차례에 걸친 도발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모든 것을 협상할 용의가 있었고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1917년 2월 독일이 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재개함에 따라 윌슨의 평화협상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 결과 미국 내의 여론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독일-멕시코-일본의 3국이 동맹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멕시코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면 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 등지를 넘겨 주겠다는 독일의 침머만 전보(Zimmermann Telegram)가 입수 되었으며, '라코니아호'의 피격으로 미국인의 인명손상 사건이 또 터지게 되자 미국인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윌슨도 이런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유럽의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조지 워싱턴의 고립주의를 버리고, 유럽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 첫 번째 미국의 대통령으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전쟁을 끝내게 하는 전쟁(war to end war)’이라는 슬로건으로 참전하였다.

1918년 1월 비밀외교의 폐지와 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가 포함된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1월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전후 사후 조치를 위한 1919년 파리평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에서는 14개조 평화원칙을 근간으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창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레닌주의 [Leninism] (행정학사전, 2009, 이종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89120&cid=41978&categoryId=41985,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아침논단] 윌슨주의를 따른 이승만, 레닌주의를 따른 김일성|작성자 애국멸공. https://blog.naver.com/raymunds/221885684821



[참고]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2035&cid=40942&categoryId=3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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