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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__한의학(韓醫學,漢醫學)과중의학(中醫學) 뚱보강사 이기성
관리자  2020-10-03 10:04:53, 조회 : 26, 추천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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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__ 한의학(韓醫學,漢醫學)과 중의학(中醫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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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__한의학(韓醫學,漢醫學)과중의학(中醫學)---7

뚱보강사 이기성





218__ 한의학(韓醫學,漢醫學)과 중의학(中醫學)



오늘 페이스북을 보니 “칠십대가 넘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글이 올라왔다. ① 분노를 참아야 한다. 화를 자주 내고 언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수명이 짧아진다고. ② 만족해야 한다.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③ 자연을 사랑해야한다. 방에만 있지 말고, 그냥 걷든, 운동을 하든 하여간 밖으로 나가라. ④ 자신의 몸을 아끼고 보살펴라. 건강을 잃으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는 일. ⑤ 친구를 많이 만들어라. 좋은 친구들을 많이 둔 사람들이 20% 정도 수명이 길단다.



재작년 100세에 운명하신 아버님이 85세일 때 무릎이 아프셔서 병원에 갔더니 무릎 관절이 닳아서 그러니 인공관절 수술을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으니 수술보다는 물리치료와 진통제로 통증을 줄이는 정도로 여생을 참고 살라는 의사의 권유. 그렇지만 관절염 말기 환자의 가장 큰 고통은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관절 때문에 지팡이 없이는 일상생활이 힘들고, 수면 장애를 부를 정도로 통증이 극심하다는 것. 가족들은 양약으로 못 고치면 한방으로 치료를 하자고 권했지만, 일제시대에 교육받으신 ‘한약은 엉터리고 한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아버님의 고정 관념으로 한의학 치료는 절대 반대하셨지요. 그후 3년 동안 대학병원은 물론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서 입원 치료도 하고, 통원 치료도 했는데 상태가 점점 더 나빠져서 지팡이만으로는 혼자 걷기가 힘들고, 휠체어가 필요하게 되니 드디어 한방병원에 가보자고 하신다. 한방치료 후 100세까지 지팡이는 가끔 짚으셨지만, 휠체어는 필요 없었다.



한방치료에서 치료부위와 방법은 염증·통증의 원인이 무릎 주변 근육·인대의 문제인지, 발목·무릎이 흔들려서 그런 건지, 구부정한 허리·허리통증 때문에 다리가 휘고 무릎까지 손상된 것인지, 엉덩이관절(고관절) 등 근육에 문제가 생겨 그런 지 등 원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퇴행성관절염 환자는 연골이 얇아지고 뼈가 변형돼 관절 주변의 힘줄·인대가 손상된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관절의 운동범위가 제한되고 심한 통증이 동반될 수 있다. 염증이 심한 경우 소염작용과 함께 정체된 관절 주변 근육 등의 순환력과 재생을 돕는 약침을 쓴다. 경희대 한방병원에서는 관절염으로 인한 염증·통증을 잡는 데 천연항생제인 봉독(벌의 독) 약침을 쓰기도 한다. 뼈·근육·인대 등이 비틀려진 경우 추나요법을 쓰고 어혈을 풀어주는 첩약 등을 처방한다. 침과 전기침, 몸 안에서 녹는 약실을 근섬유에 넣어줘 근력을 강화하는 매선요법을 쓰기도 한다.



한의학은 치료가 아니라 몸보신이나, 정력 관리에 전문적인 의학이라는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 이다. 일본 정부는 한의학에 일부 포함된 주술적인 부분들을 확대하여, 한의학이 '민간 요법 및 주술적 의술'이라고 폄하하였고, 한국인에게 수십 년 간 강제로 받아들여져 온 이 담론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전승되어, 한의학은 현재에 이르러서까지도 건강 보약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 한국에서 고대부터 수천 년간 발달해 내려온 의학이 한의학(韓醫學)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의학인 한의학은 한자로 한국(韓國)의 한(韓)을 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의 전통의학을 합쳐서는 한의학(漢醫學)이라 한다. 한글로는 같은 한이지만 한자가 다르다. 중의학(中醫學)은 중국의 전통의학을 말한다. 한국인조차도 ‘한국의학은 없고 중국의학을 한국의학이라고 잘못 부르는 것’이라고 틀리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다.



일본 제국이 만든 한의학 말살 정책의 영향으로 한국서는 아직도 한의와 양의가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중국은 한국처럼 양의학이 중국 전통의학인 중의학에 대해 도가 넘은 비난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한의사가 열심히 진단해서 한약을 처방해도, 양방 병원에만 가면 한약을 먹으면 간이 안 좋아지니 먹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양약 부작용도 무시하지 못할 수 있다. 양약 때문에 위장에 탈이 나서 응급실에 가거나, 머리가 빠지거나, 불면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양약 부작용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한약 부작용만 지적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 한의사를 내쫓고 일본인 양의사로 대체

대한제국 때에는 한의사들이 의료 전문인이었다.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의사를 양의사로 알고 있는데, 지석영에게는 양의사 자격증이 없으며 의생 면허를 가진 한의사였다. 1900년도 관립의학교가 설립되며 한의사가 주축이 되어 35명의 의사가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국 양의사의 시초가 되었다. 대한제국에서는 한의사들이 양방과 한방을 모두 치료하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한의사들이 주도권을 쥐고 필요에 의해 양의학을 배우는 형태였다. 이 시대의 한의사들은 서양의료시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05년 일사늑약 이후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며, 내부의원의 모든 한의사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축출되었다. 그 자리를 일본 정부는 일본에서 들어온 일본인 양의사들로 채웠다.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의 제3부-전통의학의 변화. ‘일제의 한의학 말살 정책. 의사보다 낮은 의생 취급’…‘한의사 지위 깎아내리기’에 의하면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뒤 한의학에 대해 일본 본토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정책을 폈다. 한의학의 말살을 꾀한 동시에 취약한 의료여건을 감안해 일정 부분 역할을 맡겼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초반 관련 법령을 발표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한의학을 말살키로 했다.



① 먼저 한의사를 단계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한의사가 돼서 이미 진료 중인 사람은 예외로 두고, 신규로 한의학 교육을 하거나 면허를 주는 것은 억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신규 면허조차도 5년간 유효한 임시면허를 내주어서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다. ② 아울러 한의학을 서양의학보다 아래에 두고자 했다. 서양의학 시술자를 의사(醫師), 한의학 시술자를 의생(醫生)이라고 규정한데서 알 수 있듯이 양의사는 스승이고, 한의사는 다시 의학을 배워야하는 학생 정도로 봤다. ③ 한편 침구사나 안마사는 유사의료인으로 봐서 그들의 지위를 인정했다. 한약재를 매매하는 한약종상의 진료행위도 인정했다. 당시엔 도회지나 제법 큰 읍 단위에 가야 한의사라도 만날 수 있었고, 대부분 농촌 주민이나 서민들의 유일한 의료인은 한약종상뿐이었다.



일본은 본토와 비슷한 한의학 정책을 조선에도 적용했지만 조금씩 차이를 두었다. 먼저 한의사를 없애는 방침은 동일하다. 하지만 일본과 조선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일본에서는 이미 면허를 가진 사람은 일생동안 의사 면허로 의료 활동을 보장하고 신규 면허를 아예 없앤데 비해, 조선에서는 의생으로 한 단계 낮춰 인정했고, 비록 5년마다 갱신이 필요하기는 해도 신규 면허를 발급했다. 의료사각지대인 농촌과 서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약종상을 그대로 둔 점도 달랐다. 일본은 겉으로는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내세웠지만 결국 근본적으로 조선을 열등하게 보았다.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의학전문학교를 만들고도 그곳의 졸업생들이 조선, 만주 등 식민지에서만 의사로 활동할 수 있고, 일본 본토에서는 면허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조선에 대해서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서양의료를 근간으로 한 의료체계를 만들 의지도 없었고, 그런 자본도 없었다.



* 일제는 ‘한의사를 의사가 아니라 의생’으로 규정

한의사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고, 1913년, 일제는 의생규칙(醫生規則)을 반포했다. 의사규칙과 함께 반포된 이 의생규칙에서, 한의사는 의사가 아니라 의생으로 규정되어 버렸다. 일제가 규정하는 의사란 양의학을 배운 의료인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한의사는 서양 의학을 배워야만 의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사히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학대학)의 조선인 학생 수는 재학생의 1/4에 그쳐, 서양 의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김수용 기자(ksy@msnet.co.kr)에 의하면, 일제의 탄압 때문에 결국 의생을 비롯한 한의학 종사 인력은 차츰 줄어들었다. 새로 진입하는 의생보다 숨지거나 면허를 취소당해서 퇴출되는 의생이 훨씬 많았다. 의생은 1914년 5천827명에서 1943년 3천327명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의생의 노령화였다. 의생 규칙이 발표되던 시점인 1914년 무렵 의생의 70%가량은 40대 이후였다. 그런 상황에서 신규 면허를 억제하고, 개업지역을 제한하고, 면허 갱신기간을 줄이는 등 탄압을 가한 탓에 급격히 의생이 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민중은 한의학에 의존했다. 의생은 크게 줄었지만 한의학이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농촌뿐 아니라 산간벽지 주민, 서민층 의료를 담당한 것은 약재를 거래하고 약을 지어 판매하는 한약종상이었기 때문이다. 약종상들은 대개 벽지에서 싼 값으로 약을 공급하는 인력들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대부분 서민들의 의료는 한약종상이 맡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양의사를 찾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도시에나 나가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고, 진료비도 워낙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질병은 한약종상을 찾거나 민간요법에 의지해야 했다. 도립병원이 있었던 강원도 강릉 지역에 대한 1930년 자료에도 주민 대부분이 한의를 이용했다고 나와 있다. 의료를 이용한 것이 있다고 조사된 28가구 중에서 25가구가 한의를 이용했고, 이들 중에 양의도 이용한 경험이 있다는 답은 4가구뿐이었다. 그나마 강릉에는 도립 강릉의원과 함께 의원 3곳에, 의사가 7명이나 있어서 의료기관 이용이 편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생이 20명에 달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접근하기 훨씬 편했던 곳은 아무래도 한의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 퇴행성 관절염:

https://www.sedaily.com/NewsView/1S214QKSRC

[참고] 무릎 인공관절 수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정답병원

[참고] 전통의학의 변화 <2>일제의 한의학 말살 정책: 의사보다 낮은 의생 취급…한의사 지위 '깎아내리기', 2014. 9. 2.

http://blog.daum.net/bjsound/2966

[참고]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참고] 일제의 한의학 말살 정책, 2013.07.29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7453&yy=2013#ixzz3AKnIXDgr

[참고]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97159?no=97159#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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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08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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